2008년 10월 12일
나는 과학을 좋아했었다.
나는 과학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나도 싫다. 징그럽기까지 하다. 일요일에도 그 "과학"을 위해 몇 시간씩 운전해야만 했던 오늘은 특히 심했다.
지금도 과학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심심하면 들러보는 곳은 osnews.com이고, live bookmark로 보이는 BBC 기사에서 진기한 과학 소식이 나오면 왠만한 기사보다도 먼저 클릭해서 본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 때에, 상대방이 어느정도 과학과 수학 용어를 알아듣는다면 훨씬 큰 편안함을 느낀다.
내가 싫은 것은 과학과 내가 맺은 관계이다. 내가 연구하고 싶은 내용, 내가 쓰고 싶은 논문에 대해 내가 계획 세울 수 없고 틀에 맞추어져야하는 관계.
비록 내가 노동자인지는 아리송하지만 아래에서 맑스가 한 묘사만큼은 읽어볼만했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나도 싫다. 징그럽기까지 하다. 일요일에도 그 "과학"을 위해 몇 시간씩 운전해야만 했던 오늘은 특히 심했다.
지금도 과학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심심하면 들러보는 곳은 osnews.com이고, live bookmark로 보이는 BBC 기사에서 진기한 과학 소식이 나오면 왠만한 기사보다도 먼저 클릭해서 본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 때에, 상대방이 어느정도 과학과 수학 용어를 알아듣는다면 훨씬 큰 편안함을 느낀다.
내가 싫은 것은 과학과 내가 맺은 관계이다. 내가 연구하고 싶은 내용, 내가 쓰고 싶은 논문에 대해 내가 계획 세울 수 없고 틀에 맞추어져야하는 관계.
비록 내가 노동자인지는 아리송하지만 아래에서 맑스가 한 묘사만큼은 읽어볼만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사회적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들은 모두 개개 노동자를 희생시키면서 실행된다. 즉, 생산을 발전시키는 모든 수단들은 생산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환되며, 노동자를 불완전한 인간으로 불구화하며, 노동자를 기계의 부속물로 떨어뜨리며, 그의 노동의 실제 내용을 파괴함으로써 노동을 단지 혐오스러운 고통으로 전환시키며, 과학이 독립적인 힘으로서 노동 과정에 도입되는 정도에 정비례해서 노동 과정의 지적 잠재력을 노동자로부터 소외시킨다. 또한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방법들은 모두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개악하며,노동 과정에서 노동자를 전제(專制)(그 야비함 때문에 그만큼 더 혐오스러운)에 굴복시키며, 그의 일생을 노동시간으로 전환시키며, 그의 처자를 자본이라는 파멸의 불가항력의 수레바퀴 밑으로 질질 끌고 간다.[자본을위해 노동자와 그의 가족을 희생시킨다는 뜻.] 그러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방법들은 모두 동시에 축적의 방법들이며, 역으로 축적의 확대는 모두 그러한 방법들을 발전시키는 수단이 된다. 이로부터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노동자의 상태는 그가 받는 임금이 많든지 적든지 간에 악화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끝으로 상대적 과잉 인구, 즉 산업예비군을 언제나 축적의 규모와 활력에 알맞도록 유지하고 있는 그 법칙은 불카누스 신(불과 대장일의 신)의 쐐기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결박시킨 것보다도 더 단단하게 노동자를 자본에 결박시킨다. 그 법칙은 부의 축적에 대응해 빈곤의 축적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한 쪽 끝에서의 부의 축적은 동시에 맞은 편 끝(즉,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서 생산하는 계급의 측)에서의 빈궁, 노동의 고통, 노예 상태, 무지, 야만화 및 도덕적 타락의 축적이다. (펭귄 판 Capital, 제1권, p.799.)
# by | 2008/10/12 23:05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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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326690.html
한겨레 12월 10일자, 한국 수학 과학 "잘하지만 즐기진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