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씨에 대한 반박: 혁명보다는 급진적 개혁이 바람직한가?



△ 2006년 프랑스 CPE 반대 투쟁 - 박노자 씨의 주장과 달리 서구 민중에게도 “원한과 분노”가
쌓여 있고 폭발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지난 10월 19일, 박노자 씨는 경제 위기로 인해 중국과 러시아 등이 미국을 최상부로 하는 현재의 제국주의 위계질서에 도전하면서 지정학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썼다.

나는 이에 동의하면서도, 각국 지배계급 간 세력관계뿐 아니라 국제 반전 운동과 노동계급의 단결을 통한 국제적 저항의 가능성도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을 써서 박노자 씨의 글에 링크해 뒀다.

이에 대해 박노자 씨는 <레디앙> 기고를 통해 “자본주의적 계산에 철저하게 길들여진 … 서구 민중에 대한 낭만적 꿈”을 버리라고 조언했다.

나아가 그의 반박 글은 러시아 혁명의 사례를 들어 혁명 과정에서 발생할 폭력으로 인해 평범한 다수의 삶이 강간과 유아살해 등으로 범벅이 될 것처럼 묘사하며 ‘혁명보다는 급진적 개혁이 바람직하다’는 것으로 결론 맺고 있다.

그러나 그의 러시아 혁명 묘사는 부당하다. 박노자 씨도 “1917년 혁명의 진실한 모습을 배웠다”며 극찬한 《세계를 뒤흔든 열흘》(강추!)은 러시아 혁명이 소수의 음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적극적 지지를 연거푸 획득하면서 진행됐음을 보여 준다.

또,혁명 과정에서 폭력이 나타나는 것은 지배계급이 혁명의 위협 앞에서 순순히 양보하기보단 폭력을 동원해서 혁명을 꺾으려 하기때문이다. 이에 맞서 싸우지 않을 때 오히려 더 많은 피를 보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반동 세력을 분쇄할 기회를 놓친 19세기 파리 코뮌과 20세기 독일ㆍ스페인의 경험은 반혁명의 잔인한 결과를 보여 준다.

박노자 씨는 또 서구 민중은 “원한과 분노”가 잘 축적돼 있지 않기 때문에 투쟁과 혁명에 나설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본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낳은 “원한과 분노”는 제3세계뿐 아니라 시애틀(1999년), 제노바(2001년)에서 투쟁으로 폭발했다. 프랑스 최초고용계약법 반대 투쟁(2006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들춰낸 미국 사회의 계급 모순과 영화 <식코>가 보여 주는 미국 의료체계의 문제는 “[서구의] 피지배계급이 자본/국가 체제에 대단히 잘 포섭”돼 있다는 주장을 무색케 한다.

끝으로 그는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며 금융기업 국유화, 무상 의료ㆍ무상 교육, 각종 부유세 징수, 대학 평준화와 남북한 공동 군축 등을 언급한다. 그런데 이런 과제들은 개혁주의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다함께’가 제시한 ‘더 나은 삶을 위한 주요 요구들’도 이러한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요구들을 어떻게 쟁취하느냐는 것이다. 박노자 씨는 “이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고서도” 이러한 요구들이 “국민적으로 선택되어지면” 나아갈 수 있다는 듯 얘기한다. 그러나 이런 “대단히 급진적인” 요구들을 한국의 지배계급이 “국민적 선택”만으로 순순히 들어 줄 리 없다.

이러한 요구는지난 촛불 항쟁과 같은 대규모 투쟁으로 지배계급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때에만 실현 가능하다. 그 투쟁이 발전하게 되면 자본주의질서 회복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더욱 멀리 투쟁을 밀고 나갈 것인지 택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추천 읽을꺼리
기사: 실천가들을 위한 맑스주의 입문 4 - 왜 혁명이 필요한가? (맞불 7호, 2006-08-07)
기사: 실천가들을 위한 맑스주의 입문 10 -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는가 I (맞불 18호, 2006-10-31)
책: 세계를 뒤흔든 열흘(존 리드, 책갈피, 2005)
책: 반자본주의 선언(알렉스 켈리니코스, 책갈피, 2003)

*이 글은 "저항의 촛불" 12호에 아래 글과 함께 실렸습니다.

아직도 변혁을 꿈꾸는 노동자가 박노자 씨에게
김우용(기아차지부 소속 금속노조 중앙위원)

박노자 씨는 <레디앙>에 기고한 ‘서구 민중에 대한 낭만적 꿈 버려라’라는 글에서 ‘다함께’ 회원들을 “대체로 도심 중산계층의 가정에서 곱게 커 배고픔 한 번 겪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며 “‘혁명’을 이야기할 때에 과연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머리가 아닌 피부로 아는지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썼다. 나는 이것을 읽고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박노자 씨의 이런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박노자 씨가 정말로 “‘혁명’까지 외치는 다함께 분들의 열정을 존경”한다면 최소한 사실관계는 알아 보고 이런 주장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함께의 고참 활동가 대부분은 20여 년 가까이 사회변혁 운동에 헌신해 온 사람들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탄압(국가보안법)으로 투옥됐던 사람들도 있다.

또 다함께 회원 중 절반 이상이 노동자고 그 중 상당수가 노동조합원이다. 나처럼 20년 가까이 대공장 노동자로 노동조합 운동과 사회변혁 운동의 결합을 주장하며 싸우다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경험이 있는 노동자 회원들도 있고, 비정규직으로 살면서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투쟁하는 회원도 다수 있다.

물론 젊은 청년과 학생 회원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박노자 씨의 주장처럼 ‘배고픔을 모르고 살아온 중산층의 자녀’라고 단정 지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중산층의 자녀들은 머릿속으로만 혁명을 느낀다’는 주장을 맑스ㆍ엥겔스ㆍ레닌ㆍ트로츠키 같은 ‘중산층’  또는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혁명가들이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혁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급진적 개혁이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박노자 씨의 주장에 나는 이견이 있지만 그렇다고 박노자 씨를 ‘중간 계급 교수이자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박노자 씨의 강연도 들어 본 적이 있고, 저서도 한두 권 읽어 본 바 있다. 해박한 지식과 민중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명쾌한 비판을 듣고 읽으며 내심 존경해 왔다.

박노자 씨가 주장하는 급진적 개혁의 요구들도 지지하며 함께 투쟁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다. 그러나 박노자 씨가 다함께 회원들을 함께 운동하는 동지라 생각한다면 근거도 없이 비방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by dakiller6 | 2008/11/05 23:52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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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jangxyz at 2008/11/06 16:34
이해가 잘 안되네요. "국민이 선택"했는 데도 '지배계급'이라는 데서 반대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건가요?
Commented by dakiller6 at 2008/11/07 10:10
흠, 구체적 역사적 사례들을 찾아서 다음번 포스팅 때 설명해보도록 할께요~
Commented by Da at 2008/11/08 16:28
박노자씨의 논지는
1. 혁명을 외친다고 혁명이 오는 것도 아니다.
2. 혁명들은 실제로 매우 끔찍했다.
3. 반전을 외치는 서구 노동자계급들이 복지주의말고 레닌식의 사회주의체계를 택할 이유가 없다.
반면에 다함께는
1. 혁명을 외치면 혁명이 온다.
2. 1917년 레닌 혁명은 킹왕짱이었고, 끔찍한 학살들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3. 서구 노동자계급이 반전말고도 레닌식의 사회주의혁명을 꿈꿔야 한다.
라는 것으로 정리되는 군요.
1번 쟁점은 어차피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니까 논쟁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2번 쟁점에서는 구소련의 광범위한 비밀문서와 역사자료등을 상세하게 알고있는 박노자씨가 앞도적으로 앞서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레닌을 이상시하는 한국의 분위기와 그 실상을 알고 있는 유럽의 분위기는 매우 다른 것 같구요.
3번 쟁점은 박노자씨는 그냥 서구노동자계급의 '의식의 현실'을 논한것 뿐이고 다함께는 그런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꿈꿔야 한다는 '당위'를 이야기 한것 뿐이기에 사실 논쟁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다함께가 증명할 수 없는 1번과 3번 쟁점에 대해 '역사'를 논거로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역사의 실상'에 대해서는 박노자씨가 훨씬 압도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다함께가 '우리의 1917년 레닌혁명은 그게 아니었다능!' 이라고 외치는 것은 좀 보기 안쓰럽군요. 또 '그런 반혁명식의 기도는 분쇄되어야 하며 필요악이라능!' 이라고 외치는 것은 사실 논리의 파산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경제발전에서 노동자의 희생'이나 '대테러전에서 이라크민간인의 희생'은 어쩔수 없다는 군사적 힘의 논리와 동일한 함정으로 빠지기 때문이에요.

그럼 제 논지를 정리하죠.
1. 이상적 혁명을 이렇게 저렇게 외쳐야 한다. 라는 것은 합의되거나 증명될 수 없는 '당위'나 '가치'에 불과하다. '급진적 개혁' 이라는 박노자 나 '레닌혁명'이라는 다함께나 서로 다른 당위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2. 그런 '당위'나 '가치'에 대해 어느 하나가 옳다는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또다른 역사적 반례 때문에 논파당하기가 매우 쉬우며 다함께가 바로 박노자씨에 대해 그렇게 당하고 있다.

Commented by 사유 at 2008/11/10 10:30
박노자씨의 의견이라고 정리하신 것 중에
1. 혁명을 외친다고 혁명이 오는 것도 아니다.

다함께( 아마 위 김우용씨에 대한 지칭일까요? )의 의견이라고 말하시는
1. 혁명을 외치면 혁명이 온다.
는 완전 쌩뚱맞는데요?

박노자씨에 찬성하는 것을 둘째치고라도 박노자씨는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적다고 했지 "혁명을 외친다고 혁명이 오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위 글 어디에서도 "혁명을 외치면 혁명이 온다."는 글은 없군요.

반박을 하시기 전에 먼저 글에 대해서 제대로 읽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싶네요.
제대로 글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면서 필자의 뜻을 곡해하여 단순화하고
그에 대한 반박을 하는 것은 속되게 말하자면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격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박노자씨와 주인장분의 논쟁을 재밌게 읽었던 입장에서 이글루에서 쉽게 찾기 힘든 진지한 문제제기글에서 희극적인 댓글로 웃음짓게되는게 재밌지는 않네요 :P
Commented by Da at 2008/11/08 16:48
시애틀(1999년), 제노바(2001년) 투쟁같은 경우에 서구 노동자 계급의 보편적인 투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계화의 부정적인 모습에 대한 활동가들의 특정한 투쟁이 아니었나요?
프랑스 최초고용계약법 반대 투쟁(2006년)도 프랑스노동자계급이 전면적으로 연대한 것도 아니었어요. 단지 그 계약법의 피해당사자들인 청년이나 실업자들의 투쟁이었죠. 그리고 그게 수용되면 바로 노동자계급으로 편입될 것이고 레닌식혁명을 지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들춰낸 미국 사회의 계급 모순은 실제로 존재했지요. 그러나 그 재해에 대해서 미국사회가 실제로 치유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 대중은 레닌혁명을 지지할 까요?
영화 <식코>가 보여 주는 미국 의료체계의 문제도 마찬가지에요. 오바마가 전국민의료보험을 실시해서 그 문제가 해소되면 미국노동자계급은 민주당을 배반하고 사회주의정당을 지지할까요? 한국의료보험식으로 된다면 말이에요.

이렇게 사안이 매우 다르고 상이한 것에 대해 레닌식 혁명이 하나의 완전한 해답이라고 주장하는게 다함께의 논법이에요. 논리적으로 타당한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환원론은 아주 쉬운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그렇지 않죠. '시장근본주의'가 아주쉬운 예입니다. 시장근본주의로 모든 개혁을 하면 자본주의경제가 잘 돌아가나요?

실제로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지요. 하나의 문제가 해소되면 투쟁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어떻게 더 낫게 만드는데 우리의 에너지를 투입하는 게 좋은지 실제로 생각해봐야하지 않을까요? 하나의 '당위' 에 대한 믿음을 구성하는데 에너지를 모두 투입하는게 운동권의 삶 아닌가요? 차라리 현재, 바로, 여기에서 출발해서 좋은 장점을 가진 제도를 만드는게 낫죠.
Commented by 평민 at 2008/11/10 13:23
다함께는 혁명을 외친다고 해서 혁명이 온다고 한 적은 없죠.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 영웅적인 혁명꾼들 몇몇이 일어난다고 해서 혁명이 성공하는건 아닙니다. 실제로 역사 속의 많은 혁명들은 특정 인물들이 사주하거나 주도해서 시작된 게 아니었습니다.

다함께는 그보다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봉기하는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그들을 잘 지도해서 사회주의로 가야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렇지 않으면 민중은 끓는 냄비처럼 곧 식어 버릴 테니까요.

그러나 21세기 현재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은 몹시 적다고 봐요.

지금이 신자유주의 광풍이다 뭐다 말은 많지만 극단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20세기 초처럼 굶어 죽을 걱정도 없고요. 의회민주주의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들어서고 경제적으로도 굶어 죽을 걱정 없는 나라에서는 혁명질이 잘 안나죠. 그래서 노동자들이 한 번도 실현한 적이 없는 사회주의 미래에 몸을 내맡길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해 본 적이 없는데, 리스크가 큰 모험을 왜 해요. 노동자들이 헌신적인 투사가 되서 붉은띠 두르고 팔뚝질하는 시대도 아니죠. 푸틸로프 공장에서 기름밥 먹는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굉장히 다양한 노동자들이 있고요. 소비지향적인 욕망이 꿈틀거리는 이 시대에, 뭐 하러 자본주의의 유혹을 포기하겠어요.

실제 역사 속에서 상당히 급진적인 혁명이 일어난 곳은 의외로 소수죠. 17세기 영국, 18세기 미국과 프랑스, 19세기 프랑스, 20세기 러시아 정도에요. 그리고 20세기의 혁명들은 대개 전쟁이나 대공황 같은 상황 속에서 그 나라의 역사적 조건이 모두 맞아떨어졌을 때에야 일어났어요.

그런데 아마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전쟁과 경제공황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묵시록적인 종말의 그 날을 예비하면서 혁명을 말하고 있을 거예요. 예수의 재림(프롤레타리아 독재)을 준비하며 사회주의 천년왕국을 꿈꾸고 있겠죠.

글쎄, 과연 그런 일이 닥칠까요? 제2차 세계 경제대공황? 미국과 중국 또는 미국과 러시아의 전쟁? 별로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군요. 만약 자연발생적인 봉기가 일어난다고 해도, 사회주의로 갈 가능성은 적어요.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볼셰비키가 집권할 수 있었던 건 민중이 사회주의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공감했기 때문도 아니라 전적으로 자유주의 제도정치인들이 무능했기 때문이거든요. 레닌은 운이 좋은 편이었죠. 그의 독일 친구들은 운이 나빴고요.

그런데 만약 운이 좋아서 혁명이 일어날 조건이 모두 맞아떨어진다고 해도, 꼭 사회주의로 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자본주의라는건, 의회 민주주의라는건 수 세기 동안 맹아적 형태로 존재하면서 인류가 조금씩 실험해 온 체제예요. 시장경제는 수천 년 동안이나 실험된 바 있고요. 계획경제는 어떨까요? 노동자 민주주의는 어떨까요? 사회주의의 맹아를 2008년 현재 세계 어느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답은 아니겠죠. 한 번도 해 본 일이 없이 머릿속의 공상으로만 그려본 체제를 도입하면 그게 과연 잘 돌아갈까요?

다함께 분들은 볼셰비크들이 라프르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를 막지 않았다면 러시아에 세계 최초의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는 꼴을 보게 되었을 거라고 하죠. 그래요, 10월 혁명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 다른 당을 탄압하고, 심지어 노동자를 위해 농민까지 희생시키면서 거의 모두를 적으로 돌려버렸죠. 윌슨도 처음엔 혁명 러시아를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줘야 한다며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지만 러시아가 너무 극단적으로 나가는 바람에 나중엔 분노하고 군대까지 파병했죠. 사회주의 수호논리, 아니 실은 내셔녈 씨큐리티 때문에 수많은 개인들이 국가에게 희생되었어요. 체카와 적군 때문에 억울하게 체포되고 처형된 사람도 많죠. 그리고 그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사회주의를 끝까지 연장시키기 위해 프레오브라젠스키 동지께서는 농민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했고요. 스탈린은 마지막 악역을 한거죠.

레닌은 1917~1924년 사이에 작업장의 노동자들에을 강제하는 규율을 도입했고 억압했어요. 다함께 이데올로그인 정성진도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사실이죠. 물론 다함께 분들은 내전 탓이라고만 돌리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했던 건 아니었을 거에요. 볼셰비키와 일반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 작업장의 더 많은 민주주의와 경제적 효율성 증대가 정비례하지 않는 딜레마. 이게 이론의 사회주의 이상과 현실의 사회주의 실험의 거대한 갭이었던 셈이죠.
Commented by 김유용 at 2008/11/11 14:51
안녕하세요. 다함께 라는 단체가 박노자 선생님의 블로그에서 몇 차례 언급되어 궁금해져서 홈피에서 저항의 촛불도 다운받아 읽어보고 있는 학생입니다. 이번호 저항의 촛불에 윗글이 실렸더라고요, 제가 러시아 역사나 혁명의 역사 이런걸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무엇이 맞는 진 모르겠습니다만, 박노자 선생님의 이상적인 휴머니즘의 칼날을 피해갈수 있는 완벽한 혁명은 역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허동현 선생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인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다함께 라는 단체는 반전 평화 단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반전 평화라는 게 정확하게 어디 까질 의미하는지 잘 몰라서 저항의 촛불을 읽는 순간 여러 번의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평화통일 역시 지향하시는 거 맞지요?), 개인적인 질문도 많고요. 혁명이라는 게 굳이 피를 요구해야 한다면, 아니 이상적인 국가건설을 위해 피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주석궁을 탱크로 밀어버리는 것과 남한에서 혁명을 일으켜 혹은 서구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 체제를 바꿔야 한다,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지금 북한체제가 역사적으로 검증된 실패라는 것도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만, 2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굶어죽는 체제가 이상적이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남한에선 절대적 빈곤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경우는 북한에 비해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요. 김정일의 사후에, 혹은 어느 시점에서 북한 동포들이 일어나 군부를 뒤엎고 때맞춰 공격해온 남한과 함께 새로운 혁명정권을 세워 정화된 공산주의로 돌아가야 하는 건지요(극단적인 가정입니다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있다, 뭐 이런 식으로 들려서요.

과연 20세기 초에 일어났던 혁명의 목적, 당위성이 21세기 현재의 상황에서 명분을 갖게 해주느냐가 박노자 선생님의 "대체로 도심 중산계층의 가정에서 곱게 커 배고픔을 한 번 겪어본 적이 없는 이 분들이 '혁명'을 이야기할 때에 과연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머리가 아닌 피부로 아는지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의 요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말씀하신 소설에서도 혁명이라는 위대한 목표를 위해선 다시 말해 다수의 이익을 위해선 소수가 희생되어야 한다, (물론, 이상적인 세계건설이나 혁명과정에서 이런 흑백 논리적 선택사항이 없는 게 제일이겠지만요) 혹은 소수의 희생을 '혁명'이나 '이상세계건설'이라는 이름아래 또 다른 폭력으로 '소수(지배계급이 될 수도 있고 혁명에 동참하지 않는 시민들일수도 있겠지만요)'를 강요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게다가, 역사가 보여주듯이 혁명이라는 게 조용히 일어난 것도 아니고 (지식이 짧아서요. 틀렸다면 지적바랍니다), 대부분 엄청난 피의 대가를 요구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피의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생존권을 지켜야겠다며 일어난 혁명의 당위성을 대부분의 다함께 회원 분들이 머리가 아닌 피부로 느껴봤을지는 저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김우용 금속노조 위원장님께서 하신 말씀들 중에서도, 반전 평화단체 라는 ‘다함께’의 요지와는 맞지 않는 몇 문장들이 보여서요. 예를 들어 ‘고참’ 운동가라던가, (말꼬리 잡는 거 같아 죄송합니다만) 사회변혁운동에 헌신을 해오셨다 해서 절대적 빈곤으로 살기위해 일어난 (생존권 보장이라는 단어는 시각에 따라 오해가 생길 듯해서요), 그 명분을 이해하고 있고, 그 엄청난 피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라는 식의 주장은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반전 평화단체의 이름에도 걸맞지 않다 생각하구요. 국가보안법의 피해를 받았으면 국가보안법 폐지 혹은 변경 (제가 알기론 국가보안법이 없는 나라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몇몇 군대 없는 나라들을 제외하고요) 운동을 하시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짜잘한 말꼬리 하나 더 잡자면, 마르크스는 엄청난 가난 속에서 굶어 죽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마지막으로, 박노자 선생님의 전반적인 요지는 혁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급진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 라는게 아니라, 혁명의 과정에서 오게 될 혼란, 혼돈, 혁명의 이후에 불게 될 후폭풍 (전반적으로 많은 피를 요구하는 것이었지요?) 을 경계하고, 그런 식의 혁명은 앞으로 일어나선 안 된다 라고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반전 평화단체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명분이 없다고 반대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매한가지로 아무리 명분이 충분한 혁명이라도, 적어도 다함께 라는 단체에서는 피의 대가를 필요로 하는 혁명이란 단어는 조심히 사용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끝으로, 추천해줄만한 책 없나요? 앞으로 서로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좋을 듯해서요. 많은 시간을 투자 하지 못한 글이라 뒤죽박죽인거 같습니다만, 앞으로도 자주 이야기 하게 되길 바랍니다.
Commented by dakiller6 at 2008/11/14 13:15
안녕하세요^^

우선 추천해 드릴 책은 존리즈의 "새로운 제국주의와 저항"입니다. 제가 박노자씨 글에 대해 트랙백을 걸었던 첫번째 글(이 모든 논쟁을 시작한 글;;)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쭈어보신 부분 중 많은 부분은 제가 퍼온 정병호씨 글에서 답변이 되는 것 같으나, 한가지에 대해서는 제가 답변을 해드려야할 것 같네요.

다함께는 반전 "평화"를 주장하는데 혁명에서 "폭력"을 용인하는 것이 이해가 안가신다는 질문인 거 같습니다. 폭력이 좋아서 폭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님은 충분히 아셨으리라 생각하고 전쟁을 반대하는데 있어서 평화주의자와 반제국주의자의 입장 차이에 대해서만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평화주의자이든 반제국주의자이든 모두 평화를 위해 싸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이 둘의 차이가 크게 부각되지 않죠. 그러나 평화주의자는 "-주의"라는 호칭에서도 드러나듯이 평화적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여깁니다. 그것이 아무리 불안정한 평화라 할지라도 말이지요. 극단적인 경우에는 무력 충돌 우려가 있는 일체의 저항 대신 비폭력만을 원칙적으로 주장하는 경우랄까요.

예를 들어 작년 아프간 피랍 당시에 평화주의자들은, 납치를 자행한 탈레반과 아프간 점령으로 수백만명의 난민을 양산하고 쇠락해가던 탈레반에게 다시금 힘을 실어준 미국 제국주의를 같은 수준으로 비판했었습니다. 양비론인 것이죠. 그러나 이는 옳은 접근이 아닙니다. 미국과 한국정부가 납치를 빌미로 해서 더 많은 군대를 보내고 '테러와의 전쟁'의 명분을 쌓으려는 시도에 맞서 모든 책임을 미국과 한국정부에 물어야 합니다.

이는 단지 탈레반을 미국이 예전에 후원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납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주어진 두가지 선택(1. 더 많은 파병과 "테러와의 전쟁" vs 2.미국과 다국적군의 아프간 철수)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할 것이냐는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납치사건을 소수 탈레반의 만행으로 보는 것은 전자를 강화할 것이고, 납치사건, 탈레반의 재등장, 비참한 아프간 민중의 삶의 총체적 원인을 미국의 제국주의 점령으로 본다면 두번째가 대안이 될 것입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소수에 의한 테러활동이 아니라 대중적 반전운동이기 때문에 반제국주의자들은 탈레반의 납치행위를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후자의 대안을 지지하며 평화주의자들과 논쟁했습니다.

전쟁이 보여주는 참상은 많은 이들에게 비폭력과 평화라는 구호가 매력적으로 들리게 만듭니다. 저 또한 처음에는 그런 생각으로 반전운동에 동참했었습니다. 그러나 추상적인 구호와, 학살자와 저항세력을 구분하지 않으면서 평화만을 외치는 것은 효과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 무기, 병력 그리고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학살자들에게는 평화주의자들의 양비론이 자신의 전쟁 명분을 쌓기 위한 도구로 쓰이는 현실을 보았다고 할까요. 그래서 작년부터는 제국주의에 대해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제가 너무 늦게 답변을 드린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블로그에 매일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요. 부디 제가 앞부분에서 추천해드린 책이 "김유용"님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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